[note]● 어린 시절 기억[/note]

시골 가난한 국민학교 (지금은 명칭이 초등학교로 바뀠다)를 졸업하면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하거나 강가에 나가 조개잡이를 하거나 아니면 타향에 나가 공장에 돈 벌러 나가야 할 처지지만 그래도 부모 덕분에 중학교를 가게 되는 학생들은 방과 후 교실에 남아 과외수업을 할 수가 있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생활용돈을 벌기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공부가 끝나면 선생님께서 나를 남으라고 하신다. 등사 일을 도와 달라는 것이다.

등사란 기름 먹인 원지를 철판(철필로 원지에 글을 쓰면 철판과 철필이 부딪치는 소리가  ‘가리가리’하는 소리가 난다. 그래서 일본인은 ‘가리방’이라고 부른다 )에 올려놓고 철필로 끍어 글씨를 쓴 뒤 이 원지를 등사판에 붙이고나서 시커먼 콜타르 같은 잉크 묻힌 롤러를 굴리면 종이에 글자가 찍혀 나온다. 나무로 짜 맞춘 액자 같은 판을 흔히 ‘등사판’이라고도 부른다. 오늘날 컴퓨터로 출력한 문서까지도 ‘유인물(油印物)’이라 부르는데, 이 말은 바로 기름잉크 묻은 롤러를 밀어 등사판으로 인쇄한 문서라는 뜻에서 연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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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시험문제를 미리 만들어 놓고 혼자서 롤러를 밀고 종이를 한 장 빼내고, 또 밀고 빼내고… 하다보니 검은 잉크가 시험지에 묻어 지저분해지고, 시간도 많이 걸리니까 누군가 옆에서 종이를 한 장씩 재빨리 빼내는 보조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그 보조원을 하면서 슬쩍 시험문제에 뭐가 나왔다는 것을 다 알게 된다. 당연히 늘 점수가 좋았다. 친한 친구에게 무슨 문제가 나왔다는 것도 살짝 아르켜주고 사탕도 얻어 먹기도 했다. 지금 같으면 어림없고 큰 일날 일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시골학교에서 자연스런(?) 일이고 선생님께서도 날 믿으니까 그 일을 맡겼는지도 모른다.

 

학창시절 시험 문제지부터 가정통신문까지, 학교에서 나눠준 거의 모든 문서는 이렇게 모두 등사기로 찍은 것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등사지에서 풍기는 등사 잉크의 진한 석유 냄새를 잊지 못한다. 시험 시간에 감독 선생님이 나누어준 시험지를 받으면 글자가 잘 안 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러면 감독 선생님은 가장 또렷하게 인쇄된 문제지 한 장을 가지고 들어와서는, 글씨가 잘 안 보인다는 학생들 책상으로 일일이 다가가서 가르쳐 줬다. 예쁜 여선생님이 남학생반에 시험 감독으로 들어오기라도 하면 “글자가 안 보입니다”라고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이 손을 들었던 풍경은 잊을 수가 없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초등학교 때의 친한 친구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원지에다 철필로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다. 교회에 다닌 그 친구는 교회 업무에 대한 내용을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시험문제을 쓰기도 했다. 무슨 시험문제냐 물으니 학교시험 문제라고 하며 아르바이트 일을 하며 용돈을 번다고 했다. 그러고는 나 보고 한 번 해보라는 소개도 해 주었다. 늘 방 안에 쪼그려 앉아 글쓰는 것이 너무 답답한 것 같아서 안 하겠다고 했다.

 

 

[note]● 철필과 한글 인연[/note]

나는 군행정병으로 36개월 복무하면서 챠트 작성도 많이 했고 원지에 철필로 끍어 쓴 문서를 등사기에 밀어 각 부대에 발송하거나 게시하는 일을 주로 했다. 그것이 철필과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제대 후 옥외광고 간판업을 직업으로 삼으면서 글자는 나의 생업이자 수단과 방법이 되었다. 간판 글씨나 현수막 글씨는 직접 도안하여 제작하며 소비자의 기호나 요구사항에 따라 서체를 디자인해야하는 일을 하면서 간판장이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한글을 예술적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나름대로 창작에 열정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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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컴퓨터문자커팅기가 보급되고 각종 한글서체가 입력되어 원하는 글자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시대가 왔다. 그와 때를 맞춰 나도 한글서체를 개발해 보려고 시도를 했다. 여러번 좌절과 포기를 거듭하다 ‘박정희서체’를 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잊었던 향수를 떠 올리며 추억의 등사기 글씨를 되살려 보고 싶었다. 손때 묻은 글씨가 그립기만 했다. 내 이름을 걸고 철필체를 완성하게 이르렀다. 한글 11,172자 모두 입력할 수 있는 ‘김종성가로철필체, 김종성세로철필체_V, 김종성세로철필체_Vm’이 그것이다.

개발한 이 서체는 내가 철판 위에 원지를 깔고 철필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하게 쓴 글자의 재현이다.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세로쓰기도 많이 했다. 세로글은 가로글과 달리 품격이 묻어나 보는 것만으로도 품위있고 우아하다. 세로쓰기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로 기준선을 잘 지키는 데 있다. 기준선 정렬을 지키지 않으면 글자가 들죽날죽하게 되고, 그렇다고 너무 정확하게 기준선을 따르다보면 딱딱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손글씨에서 세로 기준선을 맞추듯이 세로글도 자연스런 정렬 원칙을 세워 제작하였다. 세로글_V와 세로글_Vm의 차이는 일반문서에서는 세로글_V를 사용하고 영상자막프로그램인 프리미어나 에프터애펙에서 세로글 자막을 넣을 때는 세로글_Vm을 사용하도록 별도 제작하였다.

제작한 서체가 응용프로그램에 제대로 적용되는지 서체 활용도 테스트를 위해 한글 문서 프로그램인 한컴오피스를 비롯하여 그래픽 프로그램의 대명사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그리고 영상편집프로그램인 프리미어와 에프터이펙트에 시험한 결과  원활하게 적용됨을 확인하였다. 이 서체는 한국저작권위원회에 정식 소프트웨어 등록을 마쳤다.

 

[important]● 김종성철필체 감상[/important]

 

가로철필체로 자막을 넣은 유튜브 영상입니다. 화면에 어떻게 표현되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이번에는 세로철필체로 자막을 넣은 영상입니다.

화면에 고정 된 명조체는 기아차광고 본래 서체이며, 아래로 펼쳐지는 서체는 필자의 세로철필체입니다.

두 서체를 비교하면서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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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_서시01_김종성세로철필체

 

컴퓨터 보급이 늘어난 1990년대 초부터 등사판은 사라져갔다. 하지만 지금도 더러 골동품 가게에 보이는 등사판 위에는 잊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끝없이 쌓여 있다. 어려운 시절, 배고픈 시절을 가난한 우리들과 함께한 물건이었다. 투박한 목제품이지만 오래오래 손때 묻혀가며 아껴 썼으며, 불완전한 물건이기에 오히려 더 많은 사연들이 빚어졌던 것 아닌가 한다. 컴퓨터 프린터나 복사기는 등사판보다 몇십 배 편리하기는 하지만, 40~50년 뒤 우리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는 물건이 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제 식민지 시기 항일 독립투사들은 독립선언문을 등사기를 이용하여 복사해 전국 방방곡곡에 뿌렸으며, 광복 후 학생운동이나 반체제 투쟁 유인물 작성도 모두 등사기을 이용하기도 했다. 은밀한 장소에서 유인물을 작성하여 인쇄소를 거치지 않고 집안에서 보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등사기의 역할이었다.